마라토너 이봉주 히스토리

22일 아버님 산소에서 월계관과 메달을 걸어놓고 절을 드리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하는 생각과 그동안 제대로 모시지 못했던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보스턴 마라톤 우승이라니..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기뻤던 일도, 슬펐던 일도 참 많았다.
나는 1970년 10월 10일 충청남도 천안군 성거읍 소우리 작은 시골집에서 2남 2녀(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큰 형님이 있었으니 사실은 3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100m쯤 떨어진 곳이었는데 지금은 헐려 없어졌다. 생일도 주민등록에는 10월 11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10월 10일생이다.

여느 농촌 살림이 그렇듯이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가난했다.
이제 와서 아무리 찾아봐도 초등학교 때까지 사진 한 장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봉주선수 사진1

어린아이가 뭘 알았겠는가. 온 동네가 놀이터였고 나처럼 개구장이였던 친구들도 많아 놀기에는 좋았다. 말썽도 많이 피웠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많은 분들이 놀란다.
내가 지금 내성적인 성격이라 장난꾸러기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보통 시골아이였다. 그 시절 라이벌(?)이었던 정규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참외나 사과서리'도 했고 함께 세발 자전거 경주도 하며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일곱 살이 되자 집에서 2.5㎞가량 떨어진 성거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여러 과목 중에서 체육을 좋아 했다. 공 차고 뛰어다니는 걸 잘했는데 고학년 형들과 같이 뛰어도 뒤지지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육상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우리 학교에는 육상부 같은 게 없었다.

그 때 우리 집은 농사를 지었는데 나도 일손을 많이 거들어야 했다. 그런데 애들이 그런 걸 좋아할 리가 있나. 엄마가 "봉주야 피 좀 뽑아라" 하면 '다른 애들은 노는데 왜 나만 일을 시키지'라는 생각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천안시내에 있는 천성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천성중학교는 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여기에도 육상부는 없었고 유도부만 있었다.
내가 유도할 만한 몸도 아니었고..
중학교 때 나는 몇 가지 외도(?)를 했었다. 중2 때 친구들하고 복싱도장을 몇 달 다녔다.

'스텝만 배운 수준'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를 붙였다. 태권도도 두어 달 했다. 집이 어려웠으니 도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 산다고' 삥땅을 쳐야 했다.

내가 이런 운동을 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몸이 너무 약해 다른 애들이 만만히 볼까봐 일종의 시위를 한 것이 그 하나고, 레슬링 선수였던 형(이성주)이 집에서 수도(手刀)로 차돌을 깨고 뒤꼍에서 연습도구를 만들어 단련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것이 그 두 번째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장물사건'. 그렇다고 내가 도둑질을 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친구한테 유명상표 운동화를 싼값에 산 적이 있는데 그 게 바로 '장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교장실 옆에 책상을 놓고 공부하는 '근신처분'을 받아야 했다. 당시 아버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으셨는데 어머니한테 빗자루로 원없이 맞았다.

파란만장한(?) 중학 시절을 마치고 난 천안농고로 진학했다. 여기서부터 내 육상인생이 시작됐다. 내 이력서를 보면 광천고를 졸업한 것으로 돼 있다. 물론 맞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세 군데나 다녔다는 것은 남들이 잘 모르는 일이다.

입학한 지 얼마되지 않아 중학교 때 육상을 했던 이웅종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봉주야, 같이 육상해 보지 않을래?" 마침 그 학교에 육상부가 있었다.

여러 클럽 활동부가 있었지만 다른 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축구부와 육상부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런데 축구는 비용이 많이들 것 같아 육상부에 가입을 했다.

처음 시작할 때 육상을 전혀 몰랐다. "운동할 때 입을 반바지 하나 사와." 선배의 말에 나는 단숨에 체육사로 달려갔다. 아저씨가 주는 반바지를 사들고 왔더니 선배들이 한참을 웃었다. 내가 사온 게 테니스 바지였다나..

바꿔온 육상용 팬츠를 입고, 드디어 내 육상인생이 시작됐다.
입학한 지 얼마 안된 3월에 학교에서 독립기념관을 돌아오는 코스(10㎞로 기억된다)를 뛰었는데 꼴찌는 하지 않았고 선배들도 "생각보다 잘한다"고 말했다. 그 날 이후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한 동네 살던 선배에게 가방을 맡기고 10㎞가량 떨어진 학교까지 뛰어다녔다. 피곤하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6월께 천안농고에서 천안 시내 학교간 대항 육상대회가 열렸다.

5~6개교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나는 1,500m에 나가 7등을 했다. 생각같이 잘 안됐지만 잘 하고 싶다는 욕망은 더 커졌다. 당시에는 어느 운동부나 그랬지만 선배들에게 하루 걸러 한 번씩 맞았는데 참을성이 있었는지 잘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