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겨울방학 때 전기가 찾아왔다. 3학년 선배가 대학에 진학하려고 인천체전(현 인천체대)에 테스트 겸 합숙훈련을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1학년 중에는 나밖에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막상 가겠다고 해놓고 보니 10만 원 가까운 비용(한달간 숙식비) 마련이 큰 일이었다. 집에는 얘기할 수 없어서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큰누나 (이경순)에게 손을 벌렸다.
누나는 별 말 없이 당시에는 큰 돈이었던 10만 원가량을 보내줬다(누나의 말 "봉주가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으면 그 때 돈도 더 보내주고 뒷바라지를 잘해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인천체대에서의 합숙훈련을 통해 실력이 많이 늘었다. 처음에는 선배들을 따라잡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뒤따라 뛸 수 있게 됐다.
이 합숙훈련에는 우리 말고 병천고와 삽교고에서도 몇 명이 와 있었는데 삽교고에 다니던 한 선배(이병헌)가 "네 실력이면 우리 학교에서는 장학생도 될 수 있다"며 테스트 받으러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무엇보다 등록금 면제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결국 테스트를 받고 합격을 했지만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왕 본격적으로 할거면 1년이 큰 상관있겠나 싶어 옮기기로 결심을 했다.
집에 말을 해야겠는데 부모님한테는 하기 어려워 형(이성주)에게 상의를 했다.
천안상고에서 레슬링을 하다 부모님 반대로 운동을 그만둬야 했던 형은 내 편을 들어줬다. 결국 자퇴서를 내고 삽교고 1학년으로 재입학을 하게 됐다.
삽교고로 옮기고 또다시 천안시내 학교간 대항전 1,500m에 나갔고 이번에는 1등을 했다. 육상을 시작해 처음으로 받은 상장, 기분이 짜릿해 집에 가서 자랑을 했는데 부모님은 무덤덤해 하셨다. 2학년 때는 홍성에서 온양까지의 코스를 달리는 3ㆍ1 역전경주에서 구간 2등을 했고 학교도 준우승을 했다.
그러나 대회 직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으니.. 당시 삽교고에는 씨름 태권도 육상부가 있었는데 사정이 어려워 육상부가 해체됐다. 부원들은 다른 학교로 가거나 운동을 그만두는 등 뿔뿔이 흩어지고 나 혼자만 남았다. 혼자서 운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선생님이 불러 "광천고에서 연락이 왔는데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약간 고민은 했지만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광천고로 옮기게 됐다. 그리고 그 해 경호역전 대표 선발전에서 뽑혀 가을에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나가게 됐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뛰는 코스 중 청주를 지나는 구간에 출전한 나는 구간상을 타내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3학년이 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적(전국대회 3등 이내 입상)이 없어 진로가 불투명했다. 그러다 마지막 대회였던 전국체전(수원) 10㎞에서 3위를 하며 진로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학교에서는 관동대로 보내려고 했지만 학비문제 때문에 실업팀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의 실업팀이었던 코오롱에서도 오라고 했다.
그런데 홍성 출신으로 서울시청에 다니던 친한 선배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서울시청이 월급은 적지만 야간대학도 갈 수 있다고 했으니..
결국 1990년 서울시청에 입단을 하게 됐고 서울시립대 야간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입단 후 거리를 늘려 가며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에 돌입했다. 내 평생 처음으로 풀코스(42.195㎞)를 뛴 것이 그 해 10월 열린 전국체전. 2시간19분15초로 2위를 했다.
첫출발은 좋았던 셈이다. 그러나 이듬해 동아국제마라톤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회 일주일 전 감기에 걸려 아쉽게 15위에 머물렀다.
참, 서울시청 시절 잊지 못할 일이 있다. 92년 필리핀국제육상대회에 출전했을 때의 일이다.
5,000m만 나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감독님(박해용)이 갑자기 3,000m 장애물에 출전하라는 것이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게 엄청나게 힘들다. 해본 적도 없으니 기록도 거의 꼴찌, 아무튼 이 사실은 내 공식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
서울시청팀 선수들은 보통 4년간 있다가 떠난다. 왜냐하면 서울시립대 졸업과 맞물려 새로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줘야하기 때문이다. 굳이 더 있으려면 있을 수도 있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더 좋은 조건에서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993년 여름 코오롱과 계약을 맺었고 94년부터 코오롱에서 운동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지금의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오인환 코치님이 코오롱 스포츠에서 육상단 코치로 오셨다.
막상 가겠다고 해놓고 보니 10만 원 가까운 비용(한달간 숙식비) 마련이 큰 일이었다. 집에는 얘기할 수 없어서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큰누나 (이경순)에게 손을 벌렸다.
누나는 별 말 없이 당시에는 큰 돈이었던 10만 원가량을 보내줬다(누나의 말 "봉주가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으면 그 때 돈도 더 보내주고 뒷바라지를 잘해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인천체대에서의 합숙훈련을 통해 실력이 많이 늘었다. 처음에는 선배들을 따라잡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뒤따라 뛸 수 있게 됐다.
이 합숙훈련에는 우리 말고 병천고와 삽교고에서도 몇 명이 와 있었는데 삽교고에 다니던 한 선배(이병헌)가 "네 실력이면 우리 학교에서는 장학생도 될 수 있다"며 테스트 받으러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무엇보다 등록금 면제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결국 테스트를 받고 합격을 했지만 다시 1학년으로 입학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왕 본격적으로 할거면 1년이 큰 상관있겠나 싶어 옮기기로 결심을 했다.
집에 말을 해야겠는데 부모님한테는 하기 어려워 형(이성주)에게 상의를 했다.
천안상고에서 레슬링을 하다 부모님 반대로 운동을 그만둬야 했던 형은 내 편을 들어줬다. 결국 자퇴서를 내고 삽교고 1학년으로 재입학을 하게 됐다.
삽교고로 옮기고 또다시 천안시내 학교간 대항전 1,500m에 나갔고 이번에는 1등을 했다. 육상을 시작해 처음으로 받은 상장, 기분이 짜릿해 집에 가서 자랑을 했는데 부모님은 무덤덤해 하셨다. 2학년 때는 홍성에서 온양까지의 코스를 달리는 3ㆍ1 역전경주에서 구간 2등을 했고 학교도 준우승을 했다.
그러나 대회 직후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으니.. 당시 삽교고에는 씨름 태권도 육상부가 있었는데 사정이 어려워 육상부가 해체됐다. 부원들은 다른 학교로 가거나 운동을 그만두는 등 뿔뿔이 흩어지고 나 혼자만 남았다. 혼자서 운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선생님이 불러 "광천고에서 연락이 왔는데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약간 고민은 했지만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광천고로 옮기게 됐다. 그리고 그 해 경호역전 대표 선발전에서 뽑혀 가을에 처음으로 전국대회에 나가게 됐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뛰는 코스 중 청주를 지나는 구간에 출전한 나는 구간상을 타내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3학년이 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적(전국대회 3등 이내 입상)이 없어 진로가 불투명했다. 그러다 마지막 대회였던 전국체전(수원) 10㎞에서 3위를 하며 진로를 결정할 수 있게 됐다. 학교에서는 관동대로 보내려고 했지만 학비문제 때문에 실업팀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의 실업팀이었던 코오롱에서도 오라고 했다.
그런데 홍성 출신으로 서울시청에 다니던 친한 선배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서울시청이 월급은 적지만 야간대학도 갈 수 있다고 했으니..
결국 1990년 서울시청에 입단을 하게 됐고 서울시립대 야간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입단 후 거리를 늘려 가며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에 돌입했다. 내 평생 처음으로 풀코스(42.195㎞)를 뛴 것이 그 해 10월 열린 전국체전. 2시간19분15초로 2위를 했다.
첫출발은 좋았던 셈이다. 그러나 이듬해 동아국제마라톤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회 일주일 전 감기에 걸려 아쉽게 15위에 머물렀다.
참, 서울시청 시절 잊지 못할 일이 있다. 92년 필리핀국제육상대회에 출전했을 때의 일이다.
5,000m만 나가는 줄 알고 있었는데 감독님(박해용)이 갑자기 3,000m 장애물에 출전하라는 것이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게 엄청나게 힘들다. 해본 적도 없으니 기록도 거의 꼴찌, 아무튼 이 사실은 내 공식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
서울시청팀 선수들은 보통 4년간 있다가 떠난다. 왜냐하면 서울시립대 졸업과 맞물려 새로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줘야하기 때문이다. 굳이 더 있으려면 있을 수도 있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다. 더 좋은 조건에서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1993년 여름 코오롱과 계약을 맺었고 94년부터 코오롱에서 운동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지금의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오인환 코치님이 코오롱 스포츠에서 육상단 코치로 오셨다.